게이 토론 : 성경과 동성애

먼저 이 자리에 와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들께서 이 주제에 관심 가져 주시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또한 이 이야기를 나눌 장소를 제공해 주신 칼리지 힐 연합 감리교회에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 이름은 매튜 바인스이며, 21살의 대학생입니다. 저는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2년간 오늘 여러분들께 말씀드릴 주제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저는 이곳 위치타의 사랑이 넘치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이 주제에 대한 전통적인 성경적 해석을 지지하는 교회에서 성장했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간단히 개요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저 이 주제와 관련이 있는 보다 넓은 주제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주제에 관련된 주요 성경 구절을 자세히 살펴본 뒤 결론을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동성애, 동성애자 성직자의안수 문제, 동성애자 커플을 축복해 주어야 하는가의 문제는 최근 수십 년에 걸쳐 교회 안에서 크나큰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교회 내부는 오늘날까지 이 문제에 있어서 크게 분열되어 있습니다. 보수 교회에 혁신을 요구하는 쪽에서는 동성애를 포용하고 사랑으로 감싸 주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인 반면, 개혁을 반대하는 쪽에서는 성적 순결, 거룩함,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에서의 성경의 위치를 걱정합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성경의 권위를 지켜나가며 성경의 가르침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지라도 그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냐는 것입니다.

저는 우선 이 주제에 대한 전통적 성경 해석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해석이 교회 안에서 훨씬 더 오래 전부터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또한 이 해석이 옳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대부분이 ‘새로운 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충분한 성경적 지식을바탕으로 주장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으로 가장 타당한 해석이 적용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전통적 성경 해석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성경에는 어떤 식으로든 동성간의 행동을 언급하는 구절이 여섯 군데 있으며, 여섯구절 모두 부정적입니다. 그 중 세 구절은 직접적이고 명료합니다. 구약 성경의 레위기에서 남성 간의 성관계는 금지되어 있으며, “가증하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여성들을 가리켜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라고 말하며, 남성들을 가리켜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동성 관계를 금지한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 세 구절뿐만이 아니고, 제가 나중에 다룰 다른 세 구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구절이 31000구절이나 된다는 것을 감안할때, 그 중 6개의 구절이 지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통적 해석으로 바라본다면 그 6개 구절 모두 분명동성애를 금지할 뿐만 아니라,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 곧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다는 사실을 연결 지어 생각해본다면 이 구절들은 더욱 큰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것이 원래의 창조물이었습니다 –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기 전, 죄가 세상에들어오기 전의 창조물 말입니다. 이것이 원래 있었어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관점에 의하면, 누군가가 게이라면, 그들의 성적 지향성은 죄의 표시이며, 인간의 연약함과 죄성의 표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성애적 성적 지향성을 갖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닐지라도,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그 지향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확실하게 동성애는 금지하고 이성애는 긍정적으로 허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로지동성에게만 끌리는 동성애자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따라 행동하지 말 것을 명령받으며, 그들 자신을 부정하고 그들자신의 십자가를 진 채로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눈으로 볼 때에는 불공평한 처사로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으며, 우리가 할 일은 의문을 품지 말고 오로지 순종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동성애자들은 문제가 있으며, 그것은 그들이 잘못된 상대와 성 관계를 갖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보통 정욕에 불타는 성적인 존재들로 비쳐져 왔습니다. 그래서 이성애자들이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꾸려 나갈 때, 동성애자들은 오로지 성 관계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각자의 성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성 관계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이성애자들은 한 번도 자신의 성적 지향성을 분리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없이 살아 왔습니다. 하지만 분명 이성애적 성적 지향성은 그들의 일부이며, 그것은 그들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이성애자들에게 있어 성적 지향성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들의 낭만적인 사랑과 자기 희생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적지향성은 단순한 성적 이끌림과 성적인 행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적 지향성을 가졌기 때문에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오랫동안 헌신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가족을 꾸릴 수 있습니다. 가정 자체가 성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가정은 배우자를 찾음으로써 형성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성애자들뿐만 아니라 동성애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성적 지향성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에게도 똑같습니다. 동성애자들도 똑같이 낭만적인 사랑을 하고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이성애자들이 하듯이 말입니다. 동성애자 커플 역시 이성애자들과 똑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사랑을 공유합니다.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은 여기 앉아 계신 여러분 중 대부분처럼 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들 역시 가정을 꾸리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전통적 해석의 결과는 이렇습니다. 이성애자들에게 정욕을 피하고, 가벼운 관계를 피하고 성적 문란을 피할 것을 가르친다면, 동성애자들은 낭만적인 사랑 전체를 완전히 피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성애자의 성은 근본적으로는 좋은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성애자의 성은 죄악된 방법으로 혹은 무책임한 방법으로 남용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사랑이 가득찬 결혼 관계를 맺고 우리 사회에서 축복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성애자들은, 그들이 이런 사랑의 관계를가질 수 있고, 그런 관계를 갈망하고, 그들에게 역시 이러한 관계가 똑같이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만나는 것조차 죄악이 된다고 배웁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성적 지향성은 완전히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욕이냐사랑이냐의 문제나 가벼운 관계냐 신실한 관계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동성 간의 관계는 그 배경이나 관계의 좋음에상관없이 근본적으로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동성애자들의 성적 지향성은 너무나 망가져 있고 너무나 엉망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좋은 것은 하나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좋은 관계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관계도 절대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에서 축복받는 연대를 절대 지닐 수 없으며, 그들은 절대로 가정을 꾸릴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2장 4절은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이렇게 부탁 드리고 싶습니다. 조금 불편하실 수도 있지만, 지금부터 잠시 동안 저와 오 리를 같이 걸어 주시겠습니까? 저는게이입니다. 저는 게이가 되기를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 선택할 수 있었더라도 게이가 되기를 선택하진 않았을 겁니다. 게이라는 것이 나쁜 일이라서가 아니라, 이것은 굉장히 불편하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며, 어렵고, 소외감을 느끼게 되며 외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르다는 것,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것 말입니다. 저는 안정적인 가정에서 제가 상상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사랑을 부모님에게 받으며 자랐습니다. 저는 부모님을 사랑하며, 두 분 모두와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있습니다. 자라는 동안 아무도 저를 성추행하거나 학대한 적이 없으며, 항상 저를 지지해 주시고 사랑으로 양육해 주셨습니다. 저는 누군가를 사귀어 본 적이 없으며, 결혼 전까지 혼전 순결을 지킬 것을 굳게 믿어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언젠가 꼭 결혼하여 누군가와 저의 인생을 공유하고 저의 가정을 꾸릴 날을 고대해 왔습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성경의 해석에 따르자면, 기독교인으로서 저는 이러한 사랑과, 배우자와, 가족을 꾸릴 가능성에서 완전히 제외됩니다. 하지만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나, 이성애자이지만 아직 자신의 짝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과는 달리, 저는 독신의 은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언젠가 제가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동반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리고 상대방도 저를 똑같이 좋아해 준다면, 성경에 따르자면 제 유일한 선택은 그 관계를 포기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고 혼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 일은제 평생에 걸쳐 계속될 것입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게 되는 누군가가 생길 때마다, 저는 항상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그사람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사랑에 빠질까 두려워서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해석에 따르자면, 사랑에 빠지는 것은 동성애자에게는 최악의 상황입니다. 무조건 사랑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당신은 그 관계로부터 도망쳐야 하며, 이러한 일은 당신이 누군가를 너무 좋아하게 될 때마다 항상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친구들이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는 동안 당신은 항상 혼자 남아 있겠죠. 당신은 배우자나 자식을 갖는 즐거움을 절대 갖지 못할 것이며, 평생 혼자가 될 것입니다.

자, 그럼 지금쯤 누군가가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음 그 점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해. 하지만 너는 네가 행복하자고 성경의 권위보다 너의 경험을 우선시할 수는 없어. 기독교는 너의 행복에 관한 것이 아니야. 기독교는 너의 개인적 만족감을 위한것이 아니야. 희생과 고난이 예수님의 생애에 녹아 들어 있었고,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우리 자신의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하는 거지. 그 말씀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이 주제에 대한 성경의 전통적인 해석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때 사실이 되는 것이며, 이제 저는 그 해석을 탐구해 보고자 합니다. 이미 이 해석에 두 가지의 큰 문제점이 보입니다.

첫 번째 문제점은 이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의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선한 가르침과 악한 가르침을 분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열매로 너희가 알지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마다 나쁜 열매를 냅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수 없고, 못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가르침은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쉽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많은 경우 전혀 쉽지 않습니다- 왼뺨을 맞거든 오른 뺨을 돌려 대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 네 목숨을 네 친구를 위해 희생하라.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깊은 사랑의행동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며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보여 주는 가르침입니다. 좋은 가르침은 그것이따르기 어려울지라도 인간의 존엄성에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좋은 가르침은 감정과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지 않으며, 자존감과 자아를 잃게 만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성애에 관한 성경의 전통적인 가르침의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동성애자들의 인생에 좋은 열매를 맺지 못했고, 셀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전통적 가르침이 정말 옳은 것인지 질문해 봐야 합니다.

두 번째 문제는 창세기의 첫 번째 장인 아담과 이브의 창조 이야기에서 드러납니다. 이 이야기는 자주 동성 간 연합에 반대하기 위해 쓰이곤 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으므로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는 이 창조 설계에서 벗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성경 이야기는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의 첫 번째 장과 두번째 장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과 식물들과 동물들, 사람, 그리고 땅의 다른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모두 좋거나 아주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만 제외하고 말입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해 지으신 돕는 배필은 이브, 곧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대부분의 남자-이성애자 남자들에게 꼭 맞는 배필입니다. 하지만 동성애자 남성들에게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에게 여자는 꼭 맞는 배필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성애자 남성들에게 여성이 꼭 맞는 배필이듯이, 동성애자 남성들에게 꼭 맞는 배필은 다른 동성애자 남성입니다. 이것은 동성애자 여성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꼭 맞는 배필은 다른 동성애자 여성입니다. 하지만 동성애에 관한 전통적 가르침에 의하면동성애자들은 자신에게 꼭 맞는 동반자를 찾더라도 그들을 거부하고 가족도 배우자도 없이 평생 동안 혼자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성경에서 가장 처음으로 ‘좋지 않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좋은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혼자사는 것 말입니다. 이 가르침의 결과는 파괴적이었고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전통적인 성경의 해석을 따르게 되면 우리는 이제 성경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가르치는데, 우리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은좋은 가르침은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치는데, 지금 정 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이 괜찮다고 말합니다.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더 많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 동성애를 확실하게 비난할기초를 제공한 그 여섯 개의 구절에 대한 해석을 재고해 보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이 성경 구절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어떨까요?

이 여섯 개의 구절은 무엇입니까? 구약에 세 구절, 신약에 세 구절이 있으므로, 성경의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에는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있고, 레위기 18장과 20장에는 금지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는 바울이 쓴로마서 1장과 고린도전서 6장, 디모데전서 1장에 나오는 그리스 단어 두 개가 있습니다.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로 시작해 봅시다.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과 두 천사가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 사해근처에 있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장막을 방문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들을 아주 후하게 대접했습니다. 18장 중간쯤에 하나님은 – 아브라함이 슬슬 방문객들의 정체를 눈치챌 무렵 –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과 롯의 가족이 소돔에 살았으므로, 아브라함은하나님과 협상을 하여 그 도시에서 10명의 의인만 찾아도 도시를 파괴하시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다음 장에서 두 천사가 여전히 사람의 형상을 한 채 소돔에 나타납니다. 롯은 자신의 집에서 밤을 보낼 수 있도록 두 사람을 초대하고 식사를 대접합니다. 하지만 4절에서 다음의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 위협을 가했고, 결국 천사들이 사람들을 쳐서 눈멀게 합니다. 롯과 그의 가족들은 도시를 떠나고,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불과 유황으로 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파멸은 우리가 방금 읽은 구절에 성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성적인 요소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중세 시대부터 소돔의 죄악은, 소돔이 파멸에 이른 원인은 특별히 동성애라고 믿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해석은 수 세기 동안 지배적이었고, “sodomy”라는 영어 단어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원래 생식과 관련 없는 모든 종류의 성적 관계를 일컫는 말이었으나, 역사적으로 많은 기록에서 주로 남성 간의 성적 관계를 일컫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의 이러한 해석은 더이상 지배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후에 사회에서 이 이야기를 동성애와 연관지었지만,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소돔의 사람들은 롯의 방문객들을 윤간하겠다고 위협하며, 이 방문객들이 남자의 형상을 하고 있으므로 최소한 표면적으로 볼 때 이것은 동성간의 관계가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이 구절과 동성애 사이의 유일한 연관점이며, 윤간처럼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행동과 당사자 간에 합의한 일대일의 사랑하는 관계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이 교회 분들이건 어떤 사람이라도 윤간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윤간은 지금 우리의 주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소돔의 남자들이 다른 남자를 강간하기를 원했으면 그건 그들이 동성애자였다는 것이 아닌가? 라고 누군가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벌주신 것은 단순히 그들의 강간 행위가 아닌, 동성을 향한 갈망이었을 거라고 말씀하실지도모릅니다. 하지만 남성 간의 강간은 전쟁에서, 또 많은 다른 비슷한 상황에서 흔히 상대에게 굴욕감을 주고 공격성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던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은 성적 지향성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것의 목적은 모욕과 정복이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19장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적절한 배경 지식이며, 창세기 19장의 이야기는 앞 장에서 묘사된 아브라함과 사라의 환대, 롯의 친절함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소돔 사람들의 행동을 언급한 목적은 그들이 얼마나 잔혹하게 외부인들을 대했는지를 묘사하기 위함이었지, 그들이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20번 언급되며, 어떤 구절에서는 그들이 죄가 무엇이었는지가 상세하게 묘사되지만 그 중에 동성애는 한 번도 언급되거나 관련된 적이 없습니다. 에스겔서 16장 49절에서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인용합니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주지 아니하며” 그러므로, 에스겔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소돔의 죄가 교만함과 가난한 자에 대한 무관심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과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소돔의 죄를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와 관련지으십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언급된 성경 말씀 중 오로지 한 구절만이 소돔과 고모라의 죄를 성적타락과 결부시킵니다. 유다서 7절에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를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성적 타락과 음란이 존재하며, 설령 유다서 7절이 특별히 창세기 19장 5절의 윤간을 지칭한다고 해도, 윤간은 우리가 말하려는 그런 관계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는 양쪽의 신학자들 모두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동성애를 정죄하는 성경적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하는추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제 다룰 레위기의 말씀은 동성애를 죄로 생각하는 믿음의 근거로 여전히 자주 사용됩니다 –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그리고 이 구절들은 윤간보다 동성애 문제에 있어 좀더관련이 있다고 볼 수도 있으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좀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약간의 배경 지식으로 시작해봅시다. 레위기는 성경의 세번째 책입니다. 성경의 첫 다섯 책은 차례대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이며, 출애굽기에서 시작해 신명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총 613개의 이스라엘 율법을 알려 주십니다.

레위기는 성막에서 드리는 제사의 올바른 방법에 관련된 율법을 가르칩니다. 온갖 종류의 제사와 제사에 바칠 물건들을 준비하는 방법, 정결한 음식과 불결한 음식, 질병과 신체 분비물, 성적 금기, 그리고 제사장에 관련된 규율 등이었습니다. 레위기 18장은 금지된 성적 행동 목록을 나열하고 있고, 20장은 금지된 성적 행동에 상응하는 처벌의 목록을 나열합니다. 18장과 20장에서 남성 간의 성적 행동은 금지되며, 이를 어길 경우 사형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에나와 있습니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대부분의 경우, 성경적 토론은 여기에서 끝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레위기에 실린 이 말씀을 동성애에 관련된 신학적 토론의 근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기한 일입니다. 로마서 1장이 첫번째 근거가 되어야 하며, 레위기의 말씀은 로마서에 비하면근거로서의 효력이 약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레위기의 말씀이 명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앞뒤 문맥을 볼 때 이 구약의 율법이 기독교인에게 적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많은 부분이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의 구약 율법의 위치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원래 유태인이 독점하고 있던 종교 체계에 비 유태인이 처음으로 포함된 것이므로, 초기 유대계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비 유대계 기독교인들이 600개가 넘는 유대교 율법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이 토론이 종결됩니다. 기원후 49년에 초기 교회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성회라고 불리는 모임에서 유대교 율법이 비 유대계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결론짓습니다. 구약 율법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유태인의 코셔 규정(음식에 관련된 율법)과 남성 할례였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회 이후, 이러한 유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율법들조차 기독교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동성애에 관한 논쟁이 지금도 계속되긴 하지만, 레위기에 쓰여진유태인의 율법 중 다른 중요한 율법들은 기독교인에게 적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유독 동성애에 관련된 율법만이 아직도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서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받은 자나 할례받지 않은 자나 다 똑같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구약 율법을 “멍에”라고 지칭하며 기독교인들에게 그 “멍에”를 지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골로새서 2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못 박으시”었다고 말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율법을 완전케 하시는 분으로 묘사하십니다. 그리고 로마서 10장 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8장 13절은 옛 언약이 낡았으며, 예수님께서새 언약의 기초가 되시고 기독교인들을 구약 율법에서 자유케 하신다고 말합니다. 구약의 율법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스라엘 공동체, 그리고 그들의 독특한 예배 방법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기에 기독교인들은 레위기의 율법이 자신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레위기에서 남성 간 관계를 금지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레위기는 기독교인들이 단 한 번도 금지되었다고 여긴 적 없는 많은 것들을 금지합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 11장에서는 돼지고기와 새우와 랍스터 먹는 것을 금지하지만,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것을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레위기 19장에서는 한 밭에 두종류의 씨앗을 뿌리지 말라고 말하며, 두 가지 직물로 짠 옷을 입는 것을 금하고, 머리를 자를 때 옆머리를 자르는 것을 금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행동들을 죄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종의 멍에”에서 자유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율법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율법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계속 발견하게 되는 율법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사람들은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 말씀 – 남성 간 관계를 금지하는 구절들 – 이 십계명처럼 구약 율법의 예외가 되어야 하고, 현대 기독교인들도 지켜야 하는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에는 세 가지 근거가 따릅니다. 첫번째로, 이 구절의앞뒤 구절입니다. 레위기 18장과 20장에서는 간음과 근친 상간, 그리고 수간 역시 금지됩니다. 이것들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죄악시 되는 행동이며, 따라서 동성애 역시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세 구절 앞인 18장 19절에서는 월경 중인 여성과의 관계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행동 역시 “가증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죄악된 행동은 아닙니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결함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 장에서 언급되는 다른 금기 사항 – 간음, 근친상간, 수간-들은 구약의 다른 곳에서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율법에서도, 율법 외의 다른구절에서도 말입니다. 이것들은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 에스겔서에도 나옵니다. 하지만 남성 간 관계를 금지하는 구절은레위기에서만 등장하며, 기독교인들이 ‘옛 율법’이라고 생각하는 수많은 금기 사항 가운데 하나로 언급될 뿐입니다.

아무튼 레위기에서는 이것을 가증하다고 말하고, 가증하다는 것은 좋은 일은 아님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가증하다”라는 단어는 구약 율법에서 다양한 상황에 쓰입니다. 레위기 11장에 따르면 갑각류를 먹는 것도 가증한 일이고, 신명기 14장에 따르면 토끼나 돼지고기를 먹는 것도 가증한 일입니다. 이것들 모두 가증하다고 여겨집니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월경 중인 여성과 관계를 맺는 것 역시 가증한 일입니다. 구약에서 “가증하다”는 표현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제외한 이방인 사이에서 흔했던풍습을 가리킬 때 쓰였던 표현으로, 이스라엘과 이방 국가를 구분짓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습니다. 이것이 왜 창세기 43장 32절에서 이집트 인들이 히브리 인들과 같이 식사하는 것을 가증하다고 말했으며, 왜 출애굽기 8장 26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파라오의 궁전 근처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이 이집트 인들 보기에 가증스러웠던 것인지를 설명해 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희생 제사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다른 나라 사람들을 구별해 주는 선을 흐리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가증하다”는 표현은 의도적으로 문화적 특이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타 국가 사이의 종교적, 문화적 경계선을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가증하다”는 표현은 원래 좋은 것과 나쁜 것, 옳은 것과그른 것을 구분하는 데 쓰이는 표현이 아니며, 따라서 구약의 많은 금기 사항들이 현재 기독교인들의 삶과 생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입니다.

예, 하지만 동성애의 처벌은 죽음이죠. 이건 확실히 그 행동이 특별히 나쁘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을까요? 그 행동이 죄악이라는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이건 구약 율법에서 나오는 다른 금기 사항에 대한 처벌 수위를 무시하는 발언입니다. 굶주림, 질병, 내부 분란, 타 부족의 공격 등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한 위기 상황들을 생각해 볼 때, 규칙을 지키는 것과 화합하는 것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며, 따라서 구약에서 나오는 모든 처벌들은 사실 우리 눈으로 바라볼 때는 꽤 가혹합니다. 월경 중인 여성과 관계를 가질 경우 남녀 모두 공동체에서 영구히 추방됩니다. 만약 제사장의 딸이 매춘을 저질렀다면화형에 처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는 질책당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돌로 쳐서 죽여야 합니다. 부모님께순종하지 않는 사람 역시 돌로 쳐서 죽여야 합니다. 심지어 윤리적 문제라고 생각되지 않는 행동조차 구약에서는 사형감입니다- 출애굽기 35장 2절에 의하면, 안식일에 일하는 것은 사형죄입니다. 에스겔서 18장에서는 돈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는 것역시 사형감이며, 이것 역시 “가증한 일”입니다. 단순히 구약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일이라고 해서 이것이 기독교인들에게 죄가 되는 행동은 아닙니다. 그렇게 따지기엔 변수가 너무 많습니다. 2천 년에 걸쳐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구약의 수많은 율법과 규칙들이 완성되었다는 것에 동의하게 되었으며, 그렇다면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 말씀만 여기에서 예외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구약의 성경 말씀이 동성애자 기독교인들의 사랑하는 관계를 금지하지 않는다면, 신약은 어떨까요? 만약 여기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를 해 보신 분이라면, 이 이야기의 핵심 구절이 구약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핵심 구절은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보내는 서신의 첫번째 장에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6절과 27절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세 가지 이유에서 가장 핵심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첫째로, 이 말씀은 신약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레위기처럼 문맥상의 문제나 적용상의 문제가 없습니다. 둘째로, 레위기와는 달리, 로마서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모두 다룹니다. 세번째로, 매우 길지는 않지만 연속되는 두 구절이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동성 간의 행위에 관련된 구절 중 가장 깁니다. 그리고 이 두 구절은 우상 숭배에 관련된 다소 복잡한 신학적 논란의 한가운데 숨겨진 말씀이기 때문에, 저는 이 구절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3장에 이르는 그의 편지를 온 인류의 불의와 구원자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로마서 3장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유명한 말씀으로 논지를 마무리 짓기 시작합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3장의 논리를 세우기 위해 바울은로마서 2장에서 유태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행위로 구원을 얻을 만큼 완벽하게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그보다 더 넓은 관점인 전 인류의 불의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로마서 1장 18절에서 32절에 이르기까지 바울은 이방인들이 우상 숭배에 빠진 것과 그들이 하나님을 거부함으로써 따르는 결과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알았지만 거부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었으며, 창조물을 창조자 대신 섬기고 예배했습니다.- 새나, 짐승이나, 파충류와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거부했기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 없이 살도록 내버려 두셨으며, 온갖 종류의 범죄와 욕망에 사로잡히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이 욕망들 중에는 정욕에 사로잡힌 동성간 성행위도 포함되어있었습니다. 26절과 27절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자, 이제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레위기의 말씀이 기독교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을지라도, 여기 바울이 신약에서명백하게 동성애의 죄성과 받아들일 수 없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비록 정욕에 사로잡힌 행동만을 지적하고 있으며 사랑하는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바울은 동성간 연합을 역리라고 묘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연스런 설계에 어긋나며, 자연스런 설계는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세워진 이성애 관계뿐입니다. 그러므로 동성간 관계가 사랑과 헌신에기초해 있을지라도, 이것은 여전히 죄악입니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로마서 1장 26절과 27절을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이 해석은 얼마나 견고한 해석입니까? 이 구절은 모든 종류의 동성애 관계를 금지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아까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이야기와 모순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은 이 구절에서 동성애자들이 평생토록 혼자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입니까? 그들의 성적 지향성이 망가져 있고 하나님의 자연스러운 창조 계획에 어긋나기 때문에말입니까?

우리가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우리가 “자연스럽다”와 “부자연스럽다”라는 단어의 뜻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개역개정판에서는 ‘순리’와 ‘역리’라는 단어가 쓰이지만 여기서는 ‘자연스럽다’와 ‘부자연스럽다’라는 단어를사용하였습니다.) 전통적 해석을 고수하는 입장에서 이 두 단어는 창세기 1장과 2장 이야기를 참고해야 하며, 이성애를 하나님의 자연스러운 설계로, 동성애를 이 설계의 왜곡으로 가르치기 위해 등장한 단어입니다. 하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 본다면이 해석은 옳지 않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자연스럽다”와 “부자연스럽다”라는 단어를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두 가지 사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 문단을 좀더 넓은 맥락에서 바라봐야 여기에서 말하는 ‘자연’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바울이 다른 서신에서 이 단어들을 어떻게 사용했으며, 고대 사회에서 그 단어들이 어떻게 성적 행위를 묘사하는 데 쓰였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문단의 맥락입니다. 1장 18절에서 32절에 이르기까지 바울은 우상 숭배에 관한 논의를 확대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논의는 굉장히 날카롭고 논리적입니다. 18절에서 20절까지 바울은 우상 숭배자들이 비난 받아 마땅한 이유가 그들이신을 이미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시작하였으나 하나님을 거부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용서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알았고 진리로부터 시작했으나 진리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다음으로 언급한 성적 행위 역시 위의 논리 형식을 그대로 따릅니다. 그 여인들은 자연스런 관계를부자연스러운 관계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들은 여자와의 관계를 “버리고” 다른 남자들과 부끄러운 관계를 맺었습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 이성애로 시작했습니다 – 그들은 자연스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알았듯이 원래 이성애자로 태어난사람들이었습니다. –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원래 자연스러운 성향을 버리고 그들에게는 부자연스러운 행동인 동성애를 행했습니다. 바울의 우상 숭배에 관한 논쟁은 원래 있던 것을 바꾸었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우상 숭배자들이 잘못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원래 알았지만 등을 돌리고 하나님을 우상과 맞바꾸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동성애 행동을 언급한 것은 더 큰죄인 우상 숭배의 죄를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이 논리가 성립하려면, 바울이 묘사한 사람들은 반드시 이성애자로출발하여 자신의 이성애 성향을 버린 것이라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울이 말하려던 바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동성애자들은 동성에게 자연스럽게 끌리며, 이것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것은그들이 선택하는 게 아니며,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이성애를 버리거나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 그건 그들에겐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동성애자들에게 적용한다면, 바울의 논쟁은 전통적 해석과 정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의 목적이 자신의 자연스러운 상태를 버린 이들을 꾸짖기 위함이라면, 그것이 우상 숭배이건 성적인 죄건 종교적관점에서 본다면, 원래 이성애자인 사람들이 동성애자가 되면 안 되듯이, 원래 동성애자인 사람들이 이성애자가 되어서도 안된다는 말입니다. 동성애자에게는 오히려 그 편이 “자연스러운 것을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바꾸는 일”일 것입니다. 성적 지향성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것’은 모두에게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하지만 이건 단지 바울이 살던 시대에 대한 역사적인 지식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논리적으로만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원래 바울이 의도하던 것과는 다른 해석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요? 사실 성적 지향성의 개념은 아주 최근에야 생겨나서 겨우 지난 세기에 발전했고, 지난 수십 년에 걸쳐서야 널리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니 현대적인 개념을 고대에 적용시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 아니겠냐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동성애는 다른 성적 지향성이나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어떤 것으로 인식된 것이 아니라, 모든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자기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정욕이 넘쳐흐를 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이에 관한 인용구 몇 개만 봐도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세기의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인 디오 크리소톰은 이렇게 썼습니다:

이러한 관계[이성애 관계]에서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가진 남자는 쉽게 정복할  있는 여자와의 사랑에 환멸감을 느낄 것이다. 이것은 너무 쉽게 가질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남성들에게 분출할 것이다. 남자와의 사랑에서 좀더 힘들고 어렵게 즐거움을 찾을  있으리라는 믿음에서 말이다.”

4세기의 한 기독교인 저술가는 동성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러한 정욕이 보통의 한계를 넘어서는 탐심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성애 관계를 버리고 동성 간에 욕구를 채우는 일은 폭식이나 폭음에 자주 비유되었습니다. 섹슈얼리티는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인식되어, 이성애 관계는 “보통의” 욕구의 산물로 생각하였고, 동성애 관계는 과다한 욕구의산물로 생각되었습니다. 개인의 성적 지향성은 이것과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관점으로 볼 때, 동성애는 과다한욕구와 관련이 지어지며,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동성애자를 비난할 이유를 제공합니다. 바울의 목적은 우상 숭배자들이 제어되지 않는 욕망에 자신들을 내맡겼다는 것을 보여 주고 그들이 직면한 성적인 혼란과 그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시대에 동성애 관계가 묘사되었던 방식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적인 혼란을 묘사하는 데 동성애가 도움이 되었던 이유는 오로지 바울이 언급한 사람들이 원래 이성애자였지만 폭발적인 정욕으로 인해 이성애 관계를 버리고 다른 것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바울이 오로지 정욕에 넘친 가벼운 성 행위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거나 서로에게 평생의 헌신을 약속하고 가족을 이루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성애자들의 정욕과 문란함을 묘사한 부분을 읽고 나서 이성애자 기독교인들의 결혼 관계를 싸잡아서 비난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히 정욕과 사랑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고, 가벼운 관계와 헌신적인 관계 사이, 문란함과 한 명만을사귀는 것 사이에도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언제나 이성애자의 성적 윤리에 관한 기독교의 가르침에 있어서 중심이 되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동성애자 기독교인들에게도 이 차이가 똑같이 적용되면 안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동성 간의 정욕과 문란함에 대해 다룬 구절을 가져다가 동성애자들이 이루는 모든 관계를 싸잡아 비판하는 데 쓸 수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이성애자들에게 적용하는 잣대와 너무 다릅니다.

이 잣대를 지지하기 위해 등장한 또 다른 주장은 바울이 단순히 동성간의 정욕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간의 정욕을 “부끄러운 것”이라 부르며 동성간 관계를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정의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미 바울이 사용한 “부자연스럽다”라는 표현이 왜 우상 숭배자들이 의도적으로 그들의 이성애적 성향을 저버린 행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로마서를 끝내기 전에 저는 바울이 “자연스럽다”는 단어를 그의 다른 서신에서 어떻게 사용했는지, 그리고 “자연스럽다”와 “부자연스럽다”라는 단어가 바울의 시대에 보통 성적인 의미에서 어떻게 쓰였는지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 1장 이외에 “자연스럽다”라는 단어를 언급한 서신 중 가장 의미 있는 서신은 고린도전서 11장입니다. 11장 13절-15절 말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만일 남자에게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이 말씀은 신약에서 로마서 1장 26,27절의 말씀과 가장 유사한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자연스럽다”라는 단어를 언급할 뿐 아니라, “욕되다”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의 “욕되다”라는 단어는 원문에서는 로마서 1장에서 쓰인 “부끄럽다”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린도전서 11장을 로마서 1장에서 해석하듯이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어로 “자연스럽다”라는 단어의 가장 흔하게 쓰이는 뜻은 관습이라는 뜻이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고린도전서의 “자연스럽다”는 단어를 “관습”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부끄럽다”나 “욕되다”는 단어 역시 특정 관습에 위배되는 행동으로해석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관습은 남자가 긴 머리를 가지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지만, 여자에게는 명예가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 해석은 고대 지중해 지방에서 가졌던 성별에 따른 머리 길이에 대한 관념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하는 편이 자연적으로 남자는 머리가 짧다고 해석하는 편보다 이해가 잘 됩니다. “자연적으로” 남자의 머리는 짧아지지 않고 길어지니까요.

어쨌든, 고린도전서의 머리 길이에 대한 말씀은 로마서 1장의 성적 행동에 관한 말씀과 가장 비슷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언급한 “자연스럽다”와 “욕되다”의 뜻을 관습에 관련된 것으로 이해한다면, 왜 로마서 1장에 나온 “자연스럽다”라는 단어도 똑같이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리고 사실 전통적인 해석보다 이렇게 해석하는 편이 고대 그리스 인과 로마 인들이 행했던 성적 행동을 고려할 때 더 적절합니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열등하게 여겨졌던 가부장적 사회에서 사람들이 성적인 행위에 대하여 논할 때 그었던 선은 성적 지향성이 아닌 능동적, 수동적 역할이었습니다. 그리스 인과로마 인들은 성경이 쓰여진 시대의 다른 사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남자의 자연스러운 역할, 관습적인 역할은 성적인 관계에있어 능동적 역할이었습니다. 여자는 수동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만약 이 둘의 역할이 뒤바뀌어 남자가 수동적이거나 여자가 능동적일 경우, 관습적인 성 역할에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부끄럽고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것이그 시절 동성 관계가 “부자연스럽게” 여겨졌던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리스 인과 로마 인이 적절한 머리 길이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처럼,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던 성 역할 역시 그들의 가부장적 문화에 특정된 것이었습니다. 머리 길이건 성 역할이건, 바울은 단순히 그 시절 그가 살던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던 단어를 가져다 쓴 것 뿐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연스럽다”라는 단어를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쓰듯이 똑같이 로마서 1장에서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적 해석에 있어서 역사적으로도 정확하게 해석하려면 일관성을 부여하여 고린도전서나 로마서에서 쓰인 “자연스럽다”라는 단어의 뜻을 동일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자연”이란 여기서 사회적 관습을 의미하며, 생물학적 질서를 뜻하는 것이 아니며 특정 문화에 한정적인 단어입니다.

남은 두 구절은 앞에서 다룬 구절들에 비하면 관련성이 덜하기 때문에 저는 여기에 시간을 많이 쓰지는 않겠습니다. 두 구절은 고린도전서 6장 9절과 디모데전서 1장 10절의 말씀이며, 여기에서 논쟁의 중심은 두 개의 그리스 단어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9절,10절 말씀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그러한 사람 열 종류를 언급합니다. 여기에서 문제되는 부분이 번역 부분이기 때문에, 저는 이 부분의킹 제임스 번역(흠정역) 구절로 시작하겠습니다. 킹 제임스 번역은 400년 전에 출판되어서 현재의 논쟁에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읽어 보겠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속지 마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여성스러운 남성이나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학대하는 자나 

(흠정역 번역본을 찾을 수 없어 King James Version 원본을 직접 번역하였습니다. 원문에서 “여성스러운 남성”은 “effeminate”이며, 현재 영어권에서는 “여성스러운 남성”을 비하하여 부르는 말로 쓰입니다.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학대하는 자”는 “abusers of themselves with mankind”입니다.)

이 논쟁에서 키워드는 “여성스러운 남성”과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학대하는 자” 입니다.

킹 제임스 성경에 사용된 이 애매모호한 단어들은 사실 이 단어들이 수백 년 동안 영문으로 번역될 때 항상 쓰였던 단어들이었습니다: 부도덕이나 남용을 뜻하지만 어떤 종류의 부도덕인지는 확실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번역이 지난 세기동안 몇몇 성경 번역자들이 이 단어를 직접적으로 동성애와 연관시키면서 바뀌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변화는 “동성애자들”이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만 기록한 1946년의 어떤 번역본에서 나타났습니다. 수십 년이 흐른 뒤, 성적 지향성과 성적 행위 사이에 구분이 확실하게 생기고 이것이 사람들 사이에 많이 알려진 뒤에, 번역은 “동성애를 행하는 사람들” 만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쓰여진 시대에 성적 지향성에 대한 개념이나이런 단어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신약의 언어인 그리스 어도, 구약의 언어인 히브리 어도, 초기 기독교 시대의 성경의언어였던 라틴어도 현재 영어 단어 중 ‘gay’를 표현하는 단어는 없었습니다. 성적 지향성에 대한 개념, 특히 동성애 지향성에대한 개념은 고대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동성애자”라는 영어 단어는 19세기 말까지 만들어지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현대 사회의 개념을 차용하여 이 단어들을 썼으리라 가정하고 번역하는 것은 상당히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다는 아니지만 성경의 많은 번역본들이 바울이 사용한 이 단어들을 동성애와 연결시키려 합니다. 예를 들자면 ‘동성애를 행하는 남성들”이나 “남성과 성관계를 맺는 남성’ 혹은 “남창”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말입니다. 번역이 이렇게 바뀌게된 근본 원인이 무엇입니까?

킹 제임스 성경에서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학대한 자들”로 번역된 단어는 복합적 단어입니다. 그리스 어에서 이것은 “arsenokoites”라고 하며, “arsen”은 “남성”을 의미하고 “koites”는 “침대”를 의미하며, 성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원에서 단어의 뜻을 결정한다면 이렇습니다: 복수형으로 남자와 침대라면 이건 분명히 남자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함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접근법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먼저, 단어의 구성 성분만을 살펴본다고 단어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접근해서 뜻을 전혀 알 수 없는 영어 단어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understand”, “butterfly”, “honeymoon”같은 단어가 그렇습니다. “honeymoon”은 “honey”와 “moon”이라는 단어로 구성되어 있지만, 두 단어를 조합한다고 “honeymoon”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단어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맥락 안에서 그 단어가 어떻게 쓰이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문제는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학대한 자들”-즉 “arsenokoites”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 어에서 거의 쓰이지 않던 단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남아 있는 기록 중 최초로 그 단어가 쓰인 곳이 바로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바울 이후로 이 단어가 쓰인 몇몇 자료에서는 보통 범죄 목록 중에 나타나는 경향을 보이므로, 맥락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운좋게도, 이 목록들 중 많은 숫자가 카테고리에 따라 그룹화 되어 있으며, 이 그리스 단어는꾸준히 성적인 범죄보다는 경제적 범죄 목록 중 하나로 나타났습니다. 이 자료와 다른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arsenokoites”라는 단어는 성적인 방법을 동원한 경제적 착취를 의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이 단어가 사랑과 헌신이 담긴 관계와 어떤 관련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 문단에서 또 문제가 되는 단어는 킹 제임스 성경에서 “여성스러운 남성”으로 번역되는 단어로, 그리스 어로는 “malakos”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 어에서 매우 흔하게 사용되며, 문자적으로 “부드럽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양한 맥락에서 모욕을 주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의지가 약하고 겁이 많거나 게으른 사람들을 부를 때 쓰는 단어였습니다. 그리고 고대에는 이 모든 결점들이 여성성과 관련이 있었으므로, “여성스러운 남성”이라는 단어를 낳게 된 것입니다. 성적인 맥락에서, 이 단어는 주로 음란함과 방탕함을 묘사하는 데 쓰였지만, 어떤 종류의 성적 관계에서든 쓰일 수 있었습니다. 종종 성적 관계에서 수동적인 역할을 취했던 남성에게 쓰이기도 했는데, 이것이 현재 이 단어를 동성애와 연관 짓는 해석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그 용도 외에도 아주 다양하게 쓰였습니다. 대부분은 심지어 성적인 것도 아니었으며, 성적인 의미로 쓰일 때도 대부분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에서 쓰였습니다. 이 수많은 단서들 중 딱 한 가지만 골라서 이것이 바울이 의미했던 바가 틀림없다고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지난 1900년간 사용되어 왔던 해석이 약간 애매해 보이더라도 그해석을 사용하는 편이 더 믿음직스럽습니다. 바울이 동성애자들만 똑 떼어내서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말했다는 것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말이 안 됩니다.

마지막 문단에서, 디모데전서 1장 10절에서 첫번째 단어인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학대한 자”는 바울이 말한 금지하는 것들중 하나로 재등장합니다. 여기서는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더럽힌 자”로 번역되었습니다. 번역에 관련된 문제와 논쟁은 고린도전서에서와 똑같습니다. 역시 다른 문헌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기록에서 유추해보면 이 구절 역시 ‘성적 억압을 이용한 경제적 착취’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성 간의 관계가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동성애와는 많이 다릅니다.

이제까지 살펴 본 여섯 구절의 성경 말씀은 어떤 측면에서 동성간의 행동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부정적인 태도를띄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결론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성적인 행동에 대한 언급은 이성간의 관계를 포함하여 거의대부분이 부정적입니다. 이것은 성이 나쁜 것이라서가 아니라, 성경에 언급된 성이 대부분 정욕, 무절제, 불륜, 음란, 강간이나폭력에 관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맞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부정적인 성에 대한 말씀에 더해 이성간의 관계에 대해서는긍정적인 확신을 내려줍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동성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긍정적인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성간의 행동 자체가 거의 언급되지 않으며, 사랑이 포함된 관계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아주 조금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창세기 19장에는 협박에 의한 윤간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6장과 디모데전서 1장에는 성적인 착취에 대한내용이 나옵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정욕적인 동성간의 행위를 일반적인 성적인 혼돈과 무절제의 예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러한 행동을 “부자연스럽다”라고 표현했지만, 이 단어는 “관습적이지 않은” 성 역할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가 남자의 긴 머리를 “부자연스럽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남성간의 동성 행위를 금지한 유일한 구절은 레위기에 있으며, 현재 기독교인들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 구약의 율법 중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한 번도 직접적으로 동성 간의 헌신적인 관계를 지목한 적이 없으며 비난한 적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성적 지향성에 대한 가르침이 없으며, 동성애자들에게 평생토록 독신을 강요하는 구절 역시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강요된 독신 생활이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확실히 합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신 구약에서만이 아니고,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은 결혼과 독신 생활에 대해 썼습니다. 바울 자신은 독신이었으며 그는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모두 독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모두에게는 각기 다른 은사가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독신이 그의 영적인 은사였으며, 바울 역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그 은사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독신의 은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까닭에 성적인 부도덕이 만연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독신의 은사가 없는 기독교인들에게 성적인 죄를 피하는 방법으로 결혼을 제시합니다. 바울은 “정욕에 불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독신의 은사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독신의사명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성애자 기독교인이나 동성애자 기독교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성애자 기독교인들에게 성적인 죄를 피하는 방법이 결혼이라면, 동성애자 기독교인들에게는 이것이 적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교회에서, 또 사회에서 벌어지는 동성 결혼에 관련된 논쟁과 토론은 추상적인 대화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자가 남자와결혼하는 것이 옳은가? 혹은 여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것이 옳은가? 그것은 옳은 것 같지 않습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대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위해 남자를 만드셨고, 남자를 위해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설계이며, 그분의 결혼에 대한 정의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훼손하거나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들은 언제나 사람들이 만들어 온 것이며, 이성애자인 자신들을 위해 해온 주장입니다. 언제나 그 논리에 꼭 들어맞았고, 자기 친구들과, 또 자기 부모님과, 세상 모든 다른 사람들과 성적 지향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년 동안 혼자서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 해본 적이없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 동성애자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이성애자들 중에는 동성애자 기독교인들이 자신들보다 열등하거나 뭔가 잘못되었거나, 혹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자기처럼 이성애자로 창조하셨는데도 동성애자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오로지 그들이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자꾸만 우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저도 하나님의 피조물 중 하나입니다. 제 성적 지향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 역시 하나님의 설계 중 하나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로 제가 주일학교에서 배운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만드셨고, 저를 사랑하시며, 저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이고 다른 사람보다 덜 가치 있는 존재도 더 가치 있는 존재도 아니라는사실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정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제 자신을혐오하고 자기 연민과 고통 속에 빠져 남은 생애 동안 증오에 빠져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주제인 “동성애”를 이야기할 때 진짜 동성애자가 존재하지도 않는 것마냥 추상적인 사고나 이상적인 설계, 이상적인 성 역할에 대한 관념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것은 안 됩니다. 예수님은 무시당하고 따돌림받고 학대당하는 소수자들에게특별히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산다면, 우리 역시 소수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에서는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자들과 함께 울라”라고 말하고, 히브리서 13장 3절에서는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동성애자 기독교인들의 존재를 단순히 받아들이기만 하셨습니까, 아니면그들이 받은 상처의 깊이를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까? 그 상처가 여러분 자신의 상처같이 아프게 느껴집니까?

당신이 동성애자들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십니까? 여전히 많은 이성애자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네, 저는 동성애가 죄라는 걸 믿어요. 하지만 절 비난하진 마세요. 전 그냥 성경이 말하는 대로 할 뿐이니까요.” 글쎄요. 첫째로, 당신은 그냥 성경이 말하는 대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성경의 맥락을 무시한 채 몇 개의 구절만을뽑은 다음 원래 성경이 의도치 않았던 절대적 비난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신은 다른 사람의 중심을 공격하고 그들의 존엄성과 가치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동성애자들이 수백 년 동안 들어왔던 메시지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넌 평생토록 혼자가 될 거야. 넌 가족에게서 태어났지만 넌 가족을 꾸릴 수 없어. 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 받을 자격이 전혀 없고, 그 이유는 모두 네가 다르기 때문이야. 네가 동성애자이기 때문이야.

다르다는 것은 범죄가 아닙니다. 동성애자라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리고 동성애자에게 있어서 사랑과 결혼과 가정을 원하는 것은 이성애자들에게만큼이나 이기적인 것도, 죄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아가서는 솔로몬 왕의 혼인식 날이 “마음이 기쁠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에게 결혼을 부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평생의 사랑과 헌신과 가정을 부정하는 것은 그들에게 굉장한 상처와 괴로움을 주는 일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인의 소명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영속화 시키는 것이라고 나와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다른 이의 고통을 덜어 주는 일입니다. 특별히 그 문제가 해결하기 쉬운 일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오로지 포용뿐입니다. 성경은 동성애자 기독교인을 받아들이는 데 반대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사랑하는 관계를 갖는 것의 가능성에 반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만약 두 남자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나 두 여자가 서로 사랑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고 해도, 그리고 그 생각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해도, 저를 위해서 관점을 바꾸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당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당신은 당신의 가정을 얼마나 생각합니까? 당신의배우자를 얼마나 생각합니까? 만약 당신의 가족이 위험에 처했다면 당신은 얼마나 끈질기게 그 위험과 맞서 싸우겠습니까? 당신의 가족을 생각하는 만큼 저도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저도 당신의 가족을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동성애자들은 우리 가족, 우리 사회의 소중한 일부로 생각되어야 하며, 진정한 기독교인들이라면 그들을 받아들이고 지지하고 사랑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와주신 여러분께 모두 감사 드립니다.